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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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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두앵 2세는 1118년부터 1131년까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레텔 백작 휴 1세의 아들이자 에데사 백작이었으며, 제1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보두앵 1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으며, 이슬람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려 노력했다. 그는 여러 차례 포로로 잡히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안정을 위해 헌신했다. 보두앵 2세는 네 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의 장녀 멜리센드가 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여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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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
기본 정보
보두앵 2세
이름보두앵 2세
프랑스어 이름Baudouin
통치 정보
직위예루살렘 왕
통치 기간1118년 4월 2일 – 1131년 8월 21일
대관식1119년 12월 25일
이전 통치자보두앵 1세
후임 통치자풀크 및 멜리장드
계승 유형후계자
직위 1에데사 백작
통치 기간 11100년–1118년
이전 통치자 1보두앵 1세
후임 통치자 1조슬랭 1세
가문
가문레텔 가문
배우자
배우자모르피아
자녀
자녀멜리장드
알리스
오디에르나
요베타
출생 및 사망
아버지레텔 백작 위그 1세
어머니몽레리의 멜리장드
출생1075년경
출생지레텔, 프랑스 왕국
사망일1131년 8월 21일 (56세)
사망지예루살렘, 예루살렘 왕국
매장지예루살렘 성묘 교회, 예루살렘

2. 초기 생애

보두앵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아버지인 레텔 백작 휴 1세가 1040년대에 태어났고, 보두앵은 1090년대에 이미 성인이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보두앵은 부르크의 영주였으며,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될 때 그의 친족인 부용의 고드프루아의 군대에 합류했다.

고드프루아의 군대는 1096년 8월 15일에 성지로 출발하여 12월 23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2]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촉구했다.[3] 1097년 1월, 고드프루아는 알렉시우스와의 회담에서 보두앵, 몽테귀의 코농, 에슈의 조프루아를 자신의 대표로 임명했다.[4] 고드프루아와 주요 지휘관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십자군은 2월에 소아시아로 수송되었다.[5]

1097년 9월 15일경, 보두앵의 사촌인 부용의 보두앵과 오트빌의 탕크레드는 주력 군대에서 이탈하여 킬리키아를 침공했다.[6] 보두앵은 부용의 보두앵을 따라 셀주크 제국의 유프라테스 강 근처 평원에 있는 요새 통치자들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7][8][9] 부용의 보두앵은 라벤델, 투르베셀, 에데사를 점령한 후, 1098년 초에 최초의 십자군 국가에데사 백국을 세웠다.[10][11]

1099년 5월 말, 보두앵은 티레 근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고 있던 주력 십자군 군대에 다시 합류했다.[12] 보두앵과 탕크레드는 베들레헴을 점령했는데, 그곳에는 지역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은 없었다.[13]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두앵과 탕크레드는 무슬림 귀족을 붙잡았다.[14]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자, 보두앵의 군인들은 예루살렘 수비대를 겁주기 위해 다윗 탑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7월 15일, 예루살렘은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 8월 말, 보두앵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의 수행원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다. 로베르는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보두앵은 시리아에 남았다. 1100년 7월 18일,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사망하자, 부용의 보두앵은 그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2. 1. 가계 및 배경

보두앵 2세는 레텔 백작 위그 1세와 몽레리의 멜리센드의 아들이었다.[8] 그는 쿠르트네 가문, 몽레리 및 르 퓌제 가문, 그리고 일드프랑스의 다른 귀족 가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9] 그는 또한 불로뉴의 유스타스 3세, 부용의 고드프루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와 친척이었지만, 그들의 정확한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5]

보두앵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아버지인 레텔 백작 위그 1세가 1040년대에 태어났고, 보두앵은 1090년대에 이미 성인이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보두앵은 부르크의 영주였으며,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될 때 그의 친족인 부용의 고드프루아의 군대에 합류했다.

12세기에 쓰여진 ''예루살렘과 안티오크의 역사''[6]는 마나세 3세가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3세의 딸과 결혼했다고 언급한다. 이는 두 명의 예루살렘 보두앵 사이의 연결, 그리고 고드프루아가 1065년에 마나세에게 기증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있다.[7]

앨런 V. 머레이는 1차 자료에 따르면 보두앵 2세가 그의 선조들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으며, 보두앵은 아마도 그들의 어머니인 로렌의 이다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6] 토마스 에스브리지는 보두앵이 대신 그들의 사촌이라고 말한다.

보두앵은 모르피아와 결혼했는데, 모르피아는 멜리테네의 아르메니아 영주 가브리엘의 딸이었다.

다음 가계도는 위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두앵 2세는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의 선조의 고종 사촌이 된다.

Généalogie de Baudouin II de Jérusalem|보두앵 2세의 가계도프랑스어
colspan="2" |레텔의 마나세 2세이베트루시의 에블 1세로렌의 고드프루아 3세도다colspan="1" |colspan="1" |colspan="1" |
colspan="2" |colspan="1" |colspan="1" |colspan="1" |colspan="1" |
colspan="2" |레텔의 마나세 3세유디트colspan="1" |불로뉴의 유스타스 2세로렌의 이다colspan="1" |colspan="1" |
colspan="2" |colspan="1" |colspan="1" |
colspan="2" |레텔의 휴 1세몽트레리의 기 1세의 딸, 멜리센드colspan="1" |부용의 고드프루아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불로뉴의 유스타스 3세colspan="1" |
colspan="2" |colspan="1" |colspan="1" |colspan="1" |colspan="1" |
레텔의 게르베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레텔의 마틸다colspan="1" |colspan="1" |colspan="1" |


2. 2. 제1차 십자군 참여

보두앵은 부르크의 영주였으며, 제1차 십자군이 시작될 때 그의 친족인 부용의 고드프루아의 군대에 합류했다.[1] 이 군대는 1096년 8월 15일에 성지로 출발하여 12월 23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2]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촉구했다.[3] 1097년 1월, 부용의 고드프루아는 알렉시우스와의 회담에서 보두앵, 몽테귀의 코농, 에슈의 조프루아를 자신의 대표로 임명했다.[4] 고드프루아와 주요 지휘관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십자군 군대는 2월에 소아시아로 수송되었다.[5]

1097년 9월 15일경, 보두앵의 사촌인 부용의 보두앵과 오트빌의 탕크레드는 주력 군대에서 이탈하여 킬리키아를 침공했다.[6] 보두앵은 부용의 군대에 합류하여 그들을 따랐다.[7][8] 그는 또한 셀주크 제국의 유프라테스 강 근처 평원에 있는 요새 통치자들을 상대로 한 부용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9] 부용은 라벤델, 투르베셀, 에데사를 점령한 후, 1098년 초에 최초의 십자군 국가에데사 백국을 세웠다.[10][11]

1099년 5월 말, 보두앵은 티레 근처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고 있던 주력 십자군 군대에 다시 합류했다.[12] 그와 탕크레드는 베들레헴을 점령했는데, 그곳에는 지역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은 없었다.[13]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두앵과 탕크레드는 나이 많은 무슬림 귀족을 붙잡았다.[14]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자, 보두앵의 군인들은 예루살렘 수비대를 겁주기 위해 다윗 탑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7월 15일, 예루살렘은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 8월 말, 보두앵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의 수행원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다. 로베르는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보두앵은 시리아에 남았다. 1100년 7월 18일, 부용의 조프루아가 사망했다. 부용의 보두앵은 조프루아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3. 에데사 백작 (1100년 ~ 1118년)

보두앵은 루텔 백작 위그 1세와 메리잔드 드 몽레리의 아들로[8], 초대 에데사 백작이자 훗날 초대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1세의 먼 친척이다. 또한, 보두앵의 뒤를 이어 에데사 백작이 된 조슬랭 1세 드 쿠르트네와는 어머니가 자매 관계이다.

1100년 보두앵 1세가 에데사 백국을 떠나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자,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서 보두앵 1세를 대신하여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8] 그는 보두앵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

보두앵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멜리테네의 아르메니아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했다.[8]

1101년 초,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통치자 쇠크멘이 사루지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은 패배하고 에데사로 돌아갔다.[8] 에데사의 마태오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보두앵을 비겁하다고 묘사했다.[8]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서 새로운 병력을 모아 사루지로 돌아와 쇠크멘을 몰아내고 그와 협력한 주민들을 처형했다.[8]

1102년, 보두앵은 사촌 쿠르트네의 조슬랭에게 유프라테스 강 서쪽 땅을 주었다.[8] 같은 해 이집트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도움을 요청하자, 보두앵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이집트 군대는 이미 아스칼론으로 돌아간 뒤였다.[8]

1103년, 보두앵은 바르세흐 팔라부니에게 마을을 주어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었다.[8]

1104년 하란 전투에서 보두앵은 모술아타베그였던 쇠크멘과 지키르미쉬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으나, 보두앵과 조슬랭은 포로로 잡혔다. 1108년 여름, 보두앵은 석방되었다.

1110년 4월, 셀주크 제국 술탄은 아르메니아의 셀주크 지배자 외르크멘 엘-쿠트비와 일가지에게 십자군에 대항하도록 지시했고, 그들은 에데사를 포위했다.[8] 보두앵은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보두앵 1세는 베이루트를 함락시킨 후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지원군을 이끌고 에데사로 왔다.[8] 마우두드와 동맹군은 포위를 풀고 하란으로 퇴각했다.[8]

1111년 7월, 마우두드는 다시 백국을 침략하여 투르벨세를 포위했다.[8] 1112년 4월, 마우두드는 다시 에데사를 포위했지만, 조슬랭의 경고로 음모를 알아차린 보두앵 덕분에 실패하고 모술로 물러났다.[8]

1113년, 보두앵은 조슬랭을 에데사로 불러들여 그가 에데사에 충분한 식량을 보내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투옥했다가 투르벨세를 포기한 후에야 풀어주었다.[8]

마우두드의 후계자 악순쿠르 알-부르수키는 1114년 5월에 백국을 침략했지만, 에데사는 그의 포위를 견뎌냈고 그는 모술로 퇴각했다.

로제르 드 살레르노가 사르민 전투에서 승리하여 셀주크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보두앵은 유프라테스 계곡의 작은 아르메니아 공국들을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3. 1. 에데사 백작 즉위

1100년, 보두앵 1세가 에데사 백국을 떠나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기로 결정하면서,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서 보두앵 1세를 대신하여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8] 그는 보두앵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

보두앵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멜리테네의 아르메니아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했다.[8]

1101년 초,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통치자 쇠크멘이 사루지를 공격했다.[8] 보두앵은 마을을 구원하려 했지만 패배하고 에데사로 돌아갔다.[8] 에데사의 마태오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보두앵을 비겁하다고 묘사했다.[8]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서 새로운 병력을 모아 사루지로 돌아와 쇠크멘을 몰아내고 그와 협력한 주민들을 처형했다.[8]

1102년, 보두앵은 사촌 쿠르트네의 조슬랭에게 유프라테스 강 서쪽 땅을 주었다.[8] 같은 해 이집트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도움을 요청하자, 보두앵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이집트 군대는 이미 아스칼론으로 돌아간 뒤였다.[8]

1103년, 보두앵은 바르세흐 팔라부니에게 마을을 주어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었다.[8]

1110년 4월, 셀주크 제국 술탄은 아르메니아의 셀주크 지배자 외르크멘 엘-쿠트비와 일가지에게 십자군에 대항하도록 지시했고, 그들은 에데사를 포위했다.[8] 보두앵은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보두앵 1세는 베이루트를 함락시킨 후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지원군을 이끌고 에데사로 왔다.[8] 마우두드와 동맹군은 포위를 풀고 하란으로 퇴각했다.[8]

1111년 7월, 마우두드는 다시 백국을 침략하여 투르벨세를 포위했다.[8] 1112년 4월, 마우두드는 다시 에데사를 포위했지만, 조슬랭의 경고로 음모를 알아차린 보두앵 덕분에 실패하고 모술로 물러났다.[8]

1113년, 보두앵은 조슬랭을 에데사로 불러들여 그가 에데사에 충분한 식량을 보내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투옥했다가 투르벨세를 포기한 후에야 풀어주었다.[8]

3. 2. 통치 초기

보두앵은 보두앵 1세가 에데사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안티오키아에 머물고 있었다.[1] 그는 다니쉬멘드 가지에게 사로잡힌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 군대의 지휘관이었다.[1][2][3] 보두앵 1세는 안티오키아에서 보두앵을 소환하여 그에게 에데사 백국을 하사했다.[4][5] 보두앵은 보두앵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6] 보두앵 1세는 1100년 10월 2일 에데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7]

보두앵은 주로 아르메니아인 신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모르피아와 결혼했는데, 모르피아는 가브리엘, 즉 멜리테네의 아르메니아 영주의 딸이었다.[10][6][11] 1101년 초, 마르딘아르투크 통치자 쇠크멘이 사루지를 공격했다.[12][13] 보두앵은 마을을 구원하려 했지만, 쇠크멘은 그의 군대를 격파하여 에데사로 돌아가게 했다.[13][14] 아르메니아 역사가 에데사의 마태오는 이 사건을 기록하며 보두앵을 "몸이 불쌍한" 비겁자로 묘사했다.[12] 쇠크멘은 마을을 점령했지만, 요새는 그의 포위에 저항했다.[13] 보두앵은 사루지로 돌아가기 전에 안티오키아로 가서 새로운 병력을 모았다.[12][13] 그는 쇠크멘에게 마을을 떠나게 하고 아르투크인과 협력한 모든 마을 사람들을 처형했다.[13]

1102년, 보두앵의 사촌 쿠르트네의 조슬랭 1세가 에데사에 왔다.[6] 보두앵은 그에게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토지를 하사했다.[6] 그해 5월, 이집트인들이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하자,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한 보두앵 1세는 갈릴리와 티베리아스의 영주이자 안티오키아의 섭정인 탄크레드와 보두앵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함께 군대를 소집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지만, 9월 말에 도착했을 때는 이집트인들이 이미 아스칼론에 있는 본부로 돌아간 뒤였다. 세 명의 십자군 통치자들은 아스칼론을 습격했지만, 탄크레드와 보두앵은 곧 자신들의 영토로 돌아갔다.

탄크레드의 시리아 북부 야망은 보두앵과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인 발렌스의 베르나르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보에몽의 석방을 위해 다니쉬멘드와 협상을 시작했다. 라반과 카이순의 아르메니아 영주 코흐 바실과 보에몽의 이탈리아 친척들이 그의 몸값을 지불했다. 보에몽은 1103년 5월에 석방되었다. 보두앵은 아르메니아 신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성직자 바르세흐 팔라부니에게 마을을 하사했다.

보두앵이 투르베셀을 점령하기 위해 수도를 비운 사이, 에데사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그는 도시로 돌아와 아르메니아 마을 사람들을 사모사타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카이순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보두앵은 1114년 초에 사모사타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에데사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마우두드의 후계자 악순쿠르 알-부르수키는 1114년 5월에 백국을 침략했지만, 에데사는 그의 포위를 견뎌냈고 그는 모술로 퇴각했다. 술탄은 함마단의 부르수크를 셀주크 군대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부르수크는 1115년 초 에데사로 진격했지만, 곧 알레포로 떠났다. 알레포의 루루 엘-야야의 아타베그는 일가지와 토그테킨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들은 로제르 드 살레르노를 설득하여 부르수크에 대항하는 연합에 참여시켰다. 로제르의 요청에 따라,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 트리폴리의 퐁스와 보두앵은 8월에 시리아 아파메아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부르수크는 퇴각을 선택했고 십자군 통치자들은 흩어졌다.

로제르 드 살레르노가 사르민 전투에서 승리하여 셀주크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보두앵은 유프라테스 계곡의 작은 아르메니아 공국들을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메니아 킬리키아의 토로스 1세는 부르수크와 동맹을 맺었던 코흐 바실의 후계자 바실 드가를 사로잡았다. 토로스는 바실 드가를 보두앵에게 팔았고, 보두앵은 1116년에 그의 포로에게 라반과 카이순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다음으로, 보두앵은 아불-가리브의 요새 비레지크를 포위했다. 1년간의 포위 끝에 아불가리브는 1117년에 항복해야 했다. 보두앵은 요새를 그의 사촌 르 퓌제 백작 발레랑에게 하사했다. 같은 해, 코흐 바실의 형제 바그라트는 키루스를 포기해야 했고, 보두앵은 가르가르의 콘스탄틴을 사로잡았다.

3. 3. 하란 전투와 포로 생활

1104년 하란 전투에서 보두앵은 모술아타베그였던 쇠크멘과 지키르미쉬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보두앵은 라스 알-아인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안티오키아의 보에몽과 조슬랭에게 사절을 보내 하란을 함께 공격하자고 설득했다. 이들은 함께 하란으로 진군하여 셀주크 수비대와 평화적인 항복 협상을 시작했으나, 보두앵과 보에몽 모두 부유한 도시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에 십자군 군대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1104년 5월 7일, 쇠크멘과 지키르미쉬는 하란에서 십자군 진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가짜 후퇴 전술을 사용하여 십자군을 매복으로 유인했고, 이 과정에서 보두앵과 조슬랭이 포로로 잡혔다.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 에데사로 향했다. 포로에서 풀려난 에데사의 베네딕토 대주교와 에데사 기사들은 탕크레드를 보두앵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보두앵은 처음에 쇠크멘의 천막으로 끌려갔지만, 지키르미쉬의 병사들이 들이닥쳐 그를 데려갔다. 조슬랭은 쇠크멘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쇠크멘이 죽은 후 일가지에게 넘겨졌으며, 튀르베셀 시민들은 1107년에 조슬랭의 몸값을 지불했다.

지키르미쉬는 에데사를 포위했지만, 탕크레드가 그의 군대를 격파하여 쫓아냈다. 이후 지키르미쉬는 보두앵을 모술로 데려갔다. 탕크레드는 에데사에서 지키르미쉬 가문의 셀주크 공주를 사로잡았고, 지키르미쉬는 몸값으로 15,000 비잔틴 금화를 지불하거나, 공주의 자유를 대가로 보두앵을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돈을 선택했고, 보두앵은 계속 갇혀 있었다.

용병 출신 튀르크 병사 자왈리 사카와는 1107년에 지키르미쉬를 사로잡고 모술을 점령했다. 조슬랭은 보두앵 석방을 위해 자왈리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왈리는 60,000 디나르와 에데사의 무슬림 포로 석방을 요구했다.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 타파르는 맘루크 마우두드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임명했다. 마우두드가 자왈리를 모술에서 쫓아내자, 자왈리는 보두앵을 데리고 칼라트 자바르 요새로 도망쳤다. 조슬랭은 자왈리에게 30,000 디나르를 지불하고, 잔액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인질로 나섰다. 마우두드에 대항할 동맹이 필요했던 자왈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108년 여름에 보두앵을 풀어주었다.

3. 4. 에데사 통치 재개

보두앵은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에데사 백국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 1100년 10월 2일, 보두앵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에데사를 통치했다.

1102년, 이집트가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하자 보두앵 1세는 보두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보두앵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이집트 군대는 이미 아스칼론으로 돌아간 뒤였다.

1103년 보에몽이 석방된 후, 보두앵은 아르메니아 성직자 바르세흐 팔라부니에게 마을을 하사하며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4. 예루살렘 왕 (1118년 ~ 1131년)

에데사에서 주조된 보두앵의 동전. 지름 22 mm.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작령 시절인 1104년 하란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사로잡혀 4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1108년 풀려난 후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탄크레드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의 중재로 화해하고 에데사 백작으로 복귀했다.

1118년 보두앵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보두앵 2세는 예루살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119년 "피의 들판" 전투에서 일가지에게 대패한 안티오키아 공국을 구원하고, 보에몽 2세의 섭정을 맡았다. 1120년에는 나블루스 공의회를 열어 왕국의 법률을 제정하고 템플 기사단을 공인했다.

보두앵 2세는 1123년 다시 바락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124년 풀려났으며, 이후 1125년 아자즈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 군대를 격파하는 등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1129년에는 다마스쿠스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전임자가 이집트를 상대로 벌인 마지막 원정은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간의 화해를 가져왔다. 보두앵은 다마스쿠스의 투그테킨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이집트 재상인 알-아프달 샤한샤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하도록 설득했지만, 투그테킨은 중립을 조건으로 울트르조르당을 요구했다. 투그테킨은 갈릴리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고, 알-아프달은 1118년 5월 또는 6월에 아스칼론 근처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보두앵은 남부 국경으로 급히 달려가 로제와 퐁스에게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에서 지원군을 보낼 것을 촉구했다. 이집트인도 십자군도 야전에서 싸울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고, 두 군대 모두 3개월 후에 해산되었다. 보두앵과 조슬랭은 가을에 다마스쿠스 영토를 습격하여 다라아 근처에서 투그테킨의 아들 타지 알-물루크 부리를 격파했다.

일가지, 투그테킨, 그리고 샤이자르의 문키디트는 동맹을 맺었고, 그들의 군대는 1119년 5월에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로제는 보두앵에게 사절을 보내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올 것을 촉구했다. 사절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보두앵을 만났는데, 이는 그가 울트르조르당의 베두인 부족을 상대로 짧은 원정을 막 마쳤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를 모아 안티오크로 출발하면서 진정한 십자가의 일부를 가지고 갔다. 로제는 보두앵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안티오크에서 진군했다. 사르마다 평원에서 일가지의 군대는 십자군의 진영을 포위했고, 6월 28일에 "피의 들판" 전투에서 대패를 안겨주었다. 로제와 수백 명의 병사가 싸우다 죽었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은 포로로 잡혔다. 안티오크는 거의 방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일가지는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다.

보두앵과 트리폴리의 퐁스는 7월 말 또는 8월 초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도시 지도자들은 보두앵을 남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10세의 합법적인 왕자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인정했다. 보두앵은 피의 들판에서 죽은 귀족들의 영지를 그의 측근들에게 분배했는데, 주로 사망한 영주들의 미망인을 그들과 결혼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일가지와 투그테킨은 군대를 합류시켜 오론테스 강 동쪽의 안티오크 요새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보두앵은 거의 모든 십자군 병력을 모아 자르다나 근처의 텔 다니스까지 무슬림을 상대로 진군했다. 십자군과 투그테킨과 일가지의 연합군은 8월 14일에 하브 전투에서 충돌했다. 칸첼러 월터에 따르면, 십자군은 무슬림을 격파했지만, 에데사의 매튜는 "어느 쪽도 패배하거나 승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두앵은 이틀 후에 안티오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시민들과 총대주교는 그에게 "승자의 환영"을 보냈다. 안티오키아를 떠나기 전에 그는 에데사 백작령을 쿠르트네의 조슬랭에게 하사했다.

보두앵과 그의 아내는 크리스마스에 베들레헴에서 왕과 왕비로 즉위했다. 그는 총대주교와 함께 1120년 1월 16일에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일반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성직자들이 십일조를 징수하고 "방어의 대의를 위해"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확인했다. 공의회는 또한 간통, , 소돔 간음, 중혼을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성관계를 금지했다. 다른 법령들은 도둑과 다른 사람을 범죄로 허위 고발한 사람에 대한 처벌을 규정했다. 공의회의 결정은 예루살렘 왕국에서 최초의 법 제정의 예시였다.

휴 드 파앵과 고드프루아 드 생토메르가 성지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기사단은 역사가 말콤 바버와 크리스토퍼 타이먼에 따르면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보두앵은 잠정적으로 기사들을 성전산의 왕궁에 수용했고, 그들은 템플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시토회에 나비 사무엘을 제공했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그 장소를 수도원을 건설한 프레몽트레회에 양도했다. 공의회가 열린 직후, 보두앵과 대주교 웜먼드는 또한 교황 갈리스토 2세베네치아인에게 서신을 보내 성지의 방어를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십자군은 특히 이집트인에 대항하여 베네치아의 배가 필요했다.

일가지와 그의 조카 벨렉 가지는 1120년 5월에 에데사와 안티오크를 침략했다. 북부 십자군 국가의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던 보두앵은 다시 군대를 안티오크로 이끌기로 결정했지만, 예루살렘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상당수가 원정에 반대했다. 대주교 웜먼드는 왕립군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했고, 보두앵이 오랜 협상 끝에 진정한 십자가를 가지고 가도록 허락했다. 보두앵과 그의 군대는 6월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일가지는 십자군에게 카파르타브와 다른 두 개의 요새를 확보하는 1년 휴전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보두앵은 1121년 초에 투그테킨이 갈릴리에 대한 습격을 한 후에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7월에 그는 다마스쿠스 영토를 침략하여 투그테킨이 제라시 근처에 최근 건설한 요새를 파괴했다. 조지아의 다비드 4세는 8월에 일가지와 셀주크 왕자 토그룰 아르슬란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일가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보두앵은 오론테스 강을 건너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11월에 이것은 일가지의 아들이 십자군에게 자르다나, 아타리브 및 일가지가 전년도에 점령한 다른 요새들을 넘겨주도록 강요했다.

1122년 초, 트리폴리의 퐁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보두앵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다. 보두앵이 군대를 소집하여 트리폴리를 향해 진군하자, 퐁스는 저항 없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가지와 벨렉은 6월에 자르다나를 포위했지만, 보두앵과 에데사의 조슬랭의 도착으로 7월에 포위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벨렉은 9월 13일에 사루즈 근처에서 조슬랭을 매복하여 사로잡았다. 일가지는 아타리브를 재점령했지만, 1122년 11월 3일에 사망했다. 그의 영토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분할되었다. 여전히 안티오크에 있던 보두앵은 알레포의 새로운 통치자인 바드르 앗-다울라 술레이만을 설득하여 1123년 4월 2일에 아타리브를 십자군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보두앵은 비레지크를 재점령하고 마라쉬의 제프리 영주를 에데사의 섭정으로 만들었다.

4. 1. 왕위 계승

수염을 기른 검은 피부의 기마병과 흰 피부의 남자
포로로 잡힌 보두앵


보두앵 1세가 1100년에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자 에데사 백작이었던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보두앵 1세는 에데사 백작위를 먼 친척인 보두앵에게 넘겨주었다.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1세는 자식이 없었기에, 자신의 첫 번째 후계자로 형인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를 지명했고, 만약 형이 계승하지 못할 경우에는 보두앵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1118년 4월 2일, 보두앵 1세가 사망하고 며칠 후 예루살렘에 있던 보두앵 2세가 현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9] 프랑스에 있던 외스타슈는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보두앵이 이미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이로써 보두앵 2세의 예루살렘 왕위는 확정되었다.[9]

1123년 4월 18일, 보두앵은 북 시리아에서 일가지의 조카 바락에게 붙잡혀 디야르바키르의 카르푸트 요새에 유폐되었으며, 1년 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1]

4. 2. 통치 초기

보두앵은 석방된 후 에데사로 갔지만, 탄크레드는 그 마을을 넘겨주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1] 보두앵은 거절하고 투르베셀로 갔다.[2] 탄크레드가 투르베셀을 습격한 후, 평화 협상을 시작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3] 보두앵은 코그 바실과 동맹을 맺어 탄크레드에 대항했다.[4] 람프론의 오신도 300명의 페체네그 기병을 보내 합류했다.[5] 그들의 안티오키아 공국에 대한 습격은 탄크레드가 가톨릭 성직자들의 중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6] 그들은 보두앵의 편을 들어 결정했다. 그는 1108년 9월 18일에 에데사로 돌아왔다.[7]

자왈리와의 조약에 따라 보두앵은 에데사에 억류되어 있던 대부분의 무슬림 포로들을 석방했다.[8] 그는 또한 사루즈의 무슬림 시민들이 모스크를 짓는 것을 허락했고,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그 마을의 인기 없는 ''라이스''(또는 총독)를 처형했다.[9] 보두앵과 자왈리의 동맹은 알레포의 셀주크 통치자인 파크르 알 물크 라드완을 경계하게 했고, 이로 인해 라드완과 탄크레드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다.[10] 자왈리가 알레포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시작하자 보두앵과 코트네의 조슬랭이 그와 합류했고, 탄크레드는 라드완을 돕기 위해 왔다.[11] 라드완과 탄크레드는 1108년 9월 말 투르베셀 근처에서 자왈리, 보두앵, 조슬랭을 격파했다.[12]

보두앵은 인근 요새로 전장을 탈출했다.[13] 탄크레드는 그곳을 포위했지만, 자왈리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었다.[14] 보두앵이 죽었다고 믿은 에데사의 아르메니아 시민들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보두앵은 돌아온 후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고 주동자들의 눈을 멀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 마을의 아르메니아 주교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십자군 지도자들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는 1109년 4월에 "예루살렘 교회"의 이름으로 그들을 트리폴리 근처의 필그림 산으로 소환했다. 회의에서 왕은 보두앵과 탄크레드 사이의 화해를 중재했고, 탄크레드는 예루살렘 왕국에서 갈릴리와 다른 봉토를 받는 대가로 에데사 백작령에서 보두앵의 통치를 인정했다. 그 후 보두앵은 트리폴리 포위전에 참여했는데, 이는 십자군이 그 마을을 점령하면서 끝났다.

그의 전임자가 이집트를 상대로 벌인 마지막 원정은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간의 화해를 가져왔다. 보두앵은 다마스쿠스의 투그테킨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이집트 재상인 알-아프달 샤한샤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하도록 설득했지만, 투그테킨은 중립을 조건으로 울트르조르당을 요구했다. 투그테킨은 갈릴리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고, 알-아프달은 1118년 5월 또는 6월에 아스칼론 근처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보두앵은 남부 국경으로 급히 달려가 로제와 퐁스에게 안티오크와 트리폴리에서 지원군을 보낼 것을 촉구했다. 이집트인도 십자군도 야전에서 싸울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고, 두 군대 모두 3개월 후에 해산되었다. 보두앵과 조셀린은 가을에 다마스쿠스 영토를 습격하여 다라아 근처에서 투그테킨의 아들 타지 알-물루크 부리를 격파했다.

일가지, 투그테킨, 그리고 샤이자르의 문키디트는 동맹을 맺었고, 그들의 군대는 1119년 5월에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로제는 보두앵에게 사절을 보내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올 것을 촉구했다. 사절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보두앵을 만났는데, 이는 그가 울트르조르당의 베두인 부족을 상대로 짧은 원정을 막 마쳤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를 모아 안티오크로 출발하면서 진정한 십자가의 일부를 가지고 갔다. 로제는 보두앵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안티오크에서 진군했다. 사르마다 평원에서 일가지의 군대는 십자군의 진영을 포위했고, 6월 28일에 "피의 들판" 전투에서 대패를 안겨주었다. 로제와 수백 명의 병사가 싸우다 죽었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은 포로로 잡혔다. 안티오크는 거의 방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일가지는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다.

보두앵과 트리폴리의 퐁스는 7월 말 또는 8월 초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도시 지도자들은 보두앵을 남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10세의 합법적인 왕자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인정했다. 보두앵은 피의 들판에서 죽은 귀족들의 영지를 그의 측근들에게 분배했는데, 주로 사망한 영주들의 미망인을 그들과 결혼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일가지와 투그테킨은 군대를 합류시켜 오론테스 강 동쪽의 안티오크 요새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보두앵은 거의 모든 십자군 병력을 모아 자르다나 근처의 텔 다니스까지 무슬림을 상대로 진군했다. 십자군과 투그테킨과 일가지의 연합군은 8월 14일에 하브 전투에서 충돌했다. 칸첼러 월터에 따르면, 십자군은 무슬림을 격파했지만, 에데사의 매튜는 "어느 쪽도 패배하거나 승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두앵은 이틀 후에 안티오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시민들과 총대주교는 그에게 "승자의 환영"을 보냈다. 안티오키아를 떠나기 전에 그는 에데사 백작령을 쿠르트네의 조슬랭에게 하사했다.

보두앵과 그의 아내는 크리스마스에 베들레헴에서 왕과 왕비로 즉위했다. 그는 총대주교와 함께 1120년 1월 16일에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일반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성직자들이 십일조를 징수하고 "방어의 대의를 위해"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확인했다. 공의회는 또한 간통, 매춘, 소도미, 중혼을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성관계를 금지했다. 다른 법령들은 도둑과 다른 사람을 범죄로 허위 고발한 사람에 대한 처벌을 규정했다. 공의회의 결정은 예루살렘 왕국에서 최초의 법 제정의 예시였다.

휴 드 파앵과 고드프루아 드 생토메르가 성지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기사단은 역사가 말콤 바버와 크리스토퍼 타이먼에 따르면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보두앵은 잠정적으로 기사들을 성전산의 왕궁에 수용했고, 그들은 템플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시토회에 나비 사무엘을 제공했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그 장소를 수도원을 건설한 프레몽트레회에 양도했다. 공의회가 열린 직후, 보두앵과 대주교 웜먼드는 또한 교황 갈리스토 2세베네치아인에게 서신을 보내 성지의 방어를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십자군은 특히 이집트인에 대항하여 베네치아의 배가 필요했다.

일가지와 그의 조카 벨렉 가지는 1120년 5월에 에데사와 안티오크를 침략했다. 북부 십자군 국가의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던 보두앵은 다시 군대를 안티오크로 이끌기로 결정했지만, 예루살렘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상당수가 원정에 반대했다. 대주교 웜먼드는 왕립군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했고, 보두앵이 오랜 협상 끝에 진정한 십자가를 가지고 가도록 허락했다. 보두앵과 그의 군대는 6월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일가지는 십자군에게 카파르타브와 다른 두 개의 요새를 확보하는 1년 휴전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보두앵은 1121년 초에 투그테킨이 갈릴리에 대한 습격을 한 후에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7월에 그는 다마스쿠스 영토를 침략하여 투그테킨이 제라시 근처에 최근 건설한 요새를 파괴했다. 조지아의 다비드 4세는 8월에 일가지와 셀주크 왕자 토그룰 아르슬란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일가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보두앵은 오론테스 강을 건너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11월에 이것은 일가지의 아들이 십자군에게 자르다나, 아타리브 및 일가지가 전년도에 점령한 다른 요새들을 넘겨주도록 강요했다.

1122년 초, 트리폴리의 퐁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보두앵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다. 보두앵이 군대를 소집하여 트리폴리를 향해 진군하자, 퐁스는 저항 없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가지와 벨렉은 6월에 자르다나를 포위했지만, 보두앵과 에데사의 조슬랭의 도착으로 7월에 포위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벨렉은 9월 13일에 사루즈 근처에서 조슬랭을 매복하여 사로잡았다. 일가지는 아타리브를 재점령했지만, 1122년 11월 3일에 사망했다. 그의 영토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분할되었다. 여전히 안티오크에 있던 보두앵은 알레포의 새로운 통치자인 바드르 앗-다울라 술레이만을 설득하여 1123년 4월 2일에 아타리브를 십자군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보두앵은 비레지크를 재점령하고 마라쉬의 제프리 영주를 에데사의 섭정으로 만들었다.

4. 3.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보두앵은 석방된 후 에데사로 갔지만, 탄크레드는 그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하며 에데사를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보두앵은 이를 거부하고 투르베셀로 갔다. 탄크레드가 투르베셀을 공격하자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보두앵은 코그 바실과 동맹을 맺고, 람프론의 오신은 300명의 페체네그족 기병을 보내 보두앵을 지원했다. 이들의 안티오키아 공국 습격으로 탄크레드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성직자들은 보두앵의 편을 들어주었다. 보두앵은 1108년 9월 18일에 에데사로 돌아왔다.[4]

자왈리와의 조약에 따라 보두앵은 에데사에 억류되어 있던 대부분의 무슬림 포로들을 석방했다.[5] 그는 또한 사루즈의 무슬림 시민들이 모스크를 짓는 것을 허락했고,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그 마을의 인기 없는 ''라이스''(총독)를 처형했다.[6] 보두앵과 자왈리의 동맹은 알레포의 셀주크 통치자 파크르 알 물크 라드완을 경계하게 만들었고, 이는 라드완과 탄크레드 사이의 화해로 이어졌다.[7] 자왈리가 알레포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시작하자 보두앵과 코트네의 조슬랭이 그와 합류했고, 탄크레드는 라드완을 도왔다. 라드완과 탄크레드는 1108년 9월 말 투르베셀 근처에서 자왈리, 보두앵, 조슬랭을 격파했다.[8]

보두앵은 인근 요새로 피신했다.[9] 탄크레드는 그곳을 포위했지만, 자왈리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었다.[10] 보두앵이 죽었다고 믿은 에데사의 아르메니아 시민들은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11] 보두앵은 돌아온 후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고 생각하고 주동자들의 눈을 멀게 하라고 명령했다.[12] 그 마을의 아르메니아 주교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13] 십자군 지도자들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는 1109년 4월에 "예루살렘 교회"의 이름으로 그들을 트리폴리 근처의 필그림 산으로 소환했다.[14] 회의에서 왕은 보두앵과 탄크레드의 화해를 중재했고, 탄크레드는 갈릴리와 다른 봉토를 받는 대가로 에데사 백작령에서 보두앵의 통치를 인정했다. 그 후 보두앵은 트리폴리 포위전에 참여하여 십자군이 트리폴리를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전임자가 이집트를 상대로 벌인 마지막 원정은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간의 화해를 가져왔다. 보두앵은 다마스쿠스의 투그테킨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이집트 재상인 알-아프달 샤한샤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하도록 설득했지만, 투그테킨은 중립을 조건으로 울트르조르당을 요구했다. 투그테킨은 갈릴리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고, 알-아프달은 1118년 5월 또는 6월에 아스칼론 근처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보두앵은 남부 국경으로 급히 달려가 로제와 퐁스에게 안티오크와 트리폴리에서 지원군을 보낼 것을 촉구했다. 이집트인도 십자군도 야전에서 싸울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고, 두 군대 모두 3개월 후에 해산되었다. 보두앵과 조슬랭은 가을에 다마스쿠스 영토를 습격하여 다라아 근처에서 투그테킨의 아들 타지 알-물루크 부리를 격파했다.

일가지, 투그테킨, 그리고 샤이자르의 문키디트는 동맹을 맺었고, 그들의 군대는 1119년 5월에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로제는 보두앵에게 사절을 보내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올 것을 촉구했다. 사절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보두앵을 만났는데, 이는 그가 울트르조르당의 베두인 부족을 상대로 짧은 원정을 막 마쳤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를 모아 안티오크로 출발하면서 진정한 십자가의 일부를 가지고 갔다. 로제는 보두앵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안티오크에서 진군했다. 사르마다 평원에서 일가지의 군대는 십자군의 진영을 포위했고, 6월 28일에 "피의 들판" 전투에서 대패를 안겨주었다. 로제와 수백 명의 병사가 싸우다 죽었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부분은 포로로 잡혔다. 안티오크는 거의 방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일가지는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다.

보두앵과 트리폴리의 퐁스는 7월 말 또는 8월 초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도시 지도자들은 보두앵을 남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10세의 합법적인 왕자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인정했다. 보두앵은 피의 들판에서 죽은 귀족들의 영지를 그의 측근들에게 분배했는데, 주로 사망한 영주들의 미망인을 그들과 결혼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일가지와 투그테킨은 군대를 합류시켜 오론테스 강 동쪽의 안티오크 요새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보두앵은 거의 모든 십자군 병력을 모아 자르다나 근처의 텔 다니스까지 무슬림을 상대로 진군했다. 십자군과 투그테킨과 일가지의 연합군은 8월 14일에 하브 전투에서 충돌했다. 칸첼러 월터에 따르면, 십자군은 무슬림을 격파했지만, 에데사의 매튜는 "어느 쪽도 패배하거나 승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두앵은 이틀 후에 안티오크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시민들과 총대주교는 그에게 "승자의 환영"을 보냈다. 안티오키아를 떠나기 전에 그는 에데사 백작령을 쿠르트네의 조슬랭에게 하사했다.

보두앵과 그의 아내는 크리스마스에 베들레헴에서 왕과 왕비로 즉위했다. 그는 총대주교와 함께 1120년 1월 16일에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일반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성직자들이 십일조를 징수하고 "방어의 대의를 위해"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확인했다. 공의회는 또한 간통, , 소돔 간음, 중혼을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성관계를 금지했다. 다른 법령들은 도둑과 다른 사람을 범죄로 허위 고발한 사람에 대한 처벌을 규정했다. 공의회의 결정은 예루살렘 왕국에서 최초의 법 제정의 예시였다.

휴 오브 페이엔과 고프리 드 생토메르가 성지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기사단은 역사가 말콤 바버와 크리스토퍼 타이먼에 따르면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보두앵은 잠정적으로 기사들을 성전산의 왕궁에 수용했고, 그들은 템플 기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시토회에 나비 사무엘을 제공했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그 장소를 수도원을 건설한 프레몽트레회에 양도했다. 공의회가 열린 직후, 보두앵과 대주교 웜먼드는 또한 교황 갈리스토 2세베네치아인에게 서신을 보내 성지의 방어를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십자군은 특히 이집트인에 대항하여 베네치아의 배가 필요했다.

일가지와 그의 조카 벨렉 가지는 1120년 5월에 에데사와 안티오크를 침략했다. 북부 십자군 국가의 방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던 보두앵은 다시 군대를 안티오크로 이끌기로 결정했지만, 예루살렘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상당수가 원정에 반대했다. 대주교 웜먼드는 왕립군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했고, 보두앵이 오랜 협상 끝에 진정한 십자가를 가지고 가도록 허락했다. 보두앵과 그의 군대는 6월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일가지는 십자군에게 카파르타브와 다른 두 개의 요새를 확보하는 1년 휴전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보두앵은 1121년 초에 투그테킨이 갈릴리에 대한 습격을 한 후에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7월에 그는 다마스쿠스 영토를 침략하여 투그테킨이 제라시 근처에 최근 건설한 요새를 파괴했다. 조지아의 다비드 4세는 8월에 일가지와 셀주크 왕자 토그룰 아르슬란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일가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보두앵은 오론테스 강을 건너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11월에 이것은 일가지의 아들이 십자군에게 자르다나, 아타리브 및 일가지가 전년도에 점령한 다른 요새들을 넘겨주도록 강요했다.

1122년 초, 트리폴리의 퐁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보두앵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다. 보두앵이 군대를 소집하여 트리폴리를 향해 진군하자, 퐁스는 저항 없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가지와 벨렉은 6월에 자르다나를 포위했지만, 보두앵과 에데사의 조셀린의 도착으로 7월에 포위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벨렉은 9월 13일에 사루즈 근처에서 조셀린을 매복하여 사로잡았다. 일가지는 아타리브를 재점령했지만, 1122년 11월 3일에 사망했다. 그의 영토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분할되었다. 여전히 안티오크에 있던 보두앵은 알레포의 새로운 통치자인 바드르 앗-다울라 술레이만을 설득하여 1123년 4월 2일에 아타리브를 십자군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보두앵은 비레지크를 재점령하고 마라쉬의 제프리 영주를 에데사의 섭정으로 만들었다.

보두앵은 안티오크로 갔고, 그곳에서 총대주교 베르나르가 그에게 안티오크 영토를 포기할 권한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시켰으며, 1124년 9월 6일에 티무르타쉬에게 요새를 양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10월 6일, 보두앵은 자신의 몸값을 위해 인질이 잡혀 있던 알레포를 포위했다. 두바이스 이븐 사다카와 두 명의 셀주크 왕자, 술탄 샤와 토그룰 아르슬란이 그와 합류했고, 티무르타쉬는 포위된 도시를 지원하지 않았다. 알-부르수키가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모았다. 알-부르수키의 접근 소식을 들은 두바이스 이븐 사다카는 알레포에서 철수했고, 이로 인해 보두앵은 1125년 1월 25일에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2년 넘는 부재 끝에 보두앵은 4월 3일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는 베네치아인들과의 ''파툼 워문디''를 재협상하여 소위 ''파툼 발두이니''에서 그 조건의 대부분을 승인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이 왕국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알-부르수키, 토그테킨, 홈스의 히르칸이 카파르타브를 점령하고 자르다나를 포위하자 보두앵은 다시 북쪽으로 갔다. 머레이와 바버에 따르면, 왕국에서 그를 따르는 기사가 거의 없었던 것은 그의 잦은 원정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징후였을 수 있다. 트리폴리의 폰스와 에데사의 조슬랭이 그와 합류했고, 그들은 5월 말 아자즈 전투에서 셀주크를 격파했다. 역사가 피터 록은 이 전투를 "십자군 국가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교전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노획한 전리품 덕분에 보두앵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전에 몸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보두앵이 1125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즈음에 몇몇 영향력 있는 영주들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발터 1세 브리세바르는 1125년 5월 2일에 베이루트 영주로서 ''파툼 발두이니''에 증인이 되었고, 파간 더 버틀러는 1126년에 울트레조르댕 영주로 처음 언급되었다.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파간은 르 퓌의 로만과 그의 아들 랄프가 영토를 박탈당한 후 울트레조르댕을 점령했다. 머레이는 보두앵이 로만에게 울트레조르댕을 몰수해야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로만이 그의 포로 생활 동안 그의 반대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머레이는 또한 보두앵이 1120년대 후반에 예루살렘 귀족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대한 팽창주의 정책을 채택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126년 초 요르단을 넘어 다마스쿠스 영토를 습격했다. 거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보두앵은 1월 25일에 토그테킨을 격파하고 전리품을 가득 싣고 왕국으로 돌아왔다. 그 직후 그는 트리폴리의 폰스를 지원하여 라프니예를 점령하고 홈스를 습격했다. 알-부르수키는 1126년 7월에 아타리브를 포위했다. 보두앵은 다시 북쪽으로 진군했고, 에데사의 조슬랭이 아르타에서 그와 합류했다. 양측 모두 정규 전투를 피하고 싶어했고, 알-부르수키는 알레포로 물러났다.

1126년 10월,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2세가 성년이 되자 상속을 주장하기 위해 시리아로 왔다. 그의 도착으로 안티오키아에서 보두앵의 통치가 종식되었지만, 보에몽은 보두앵의 둘째 딸 앨리스와 결혼했다. 아들이 없었던 보두앵은 1126년 또는 1127년에 장녀 멜리센드를 자신의 상속자로 삼았다.

보두앵은 이미 십자군이 유럽으로부터의 추가 지원 없이는 다마스쿠스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귀족들과 상의한 후, 1127년 가을, 멜리센드의 손을 강력한 앙주 백작인 풀크 5세에게 내밀기 위해 뷔르의 윌리엄 1세와 기 1세 브리세바레를 프랑스로 보냈다. 페앵의 휴와 그의 다섯 동료가 사절단을 동행했다. 사절단은 먼저 루이 6세를 방문하여 결혼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풀크와 보두앵의 사절단 간의 협상은 여러 달 동안 지속되었다. 1127년 8월 또는 9월, 보두앵은 다마스쿠스 영토에 대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역사가 스티븐 티블은 와디 무사의 왕립 요새가 이 직후에 건설되었다고 제안한다.

보두앵은 티레의 윌리엄 1세 대주교와 리다 및 람라의 로베르 주교를 성좌로 파견했다. 교황 호노리오 2세는 1129년 5월 29일자 서한에서 보두앵을 예루살렘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선언했다. 크리스토퍼 티어먼과 한스 에버하르트 마이어는 교황이 보두앵의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서한을 썼다는 데 동의한다. 한편, 1128년 7월 피키니의 바르문트를 계승하여 대주교가 된 라 페르테의 스테판은 보두앵을 반대하고 예루살렘을 대주교에게 요구했다.

앙주의 풀크는 1129년 봄에 성지로 왔다. 그는 멜리센드와 결혼했고 보두앵은 그들에게 왕국의 두 가장 부유한 도시인 티레와 아크레를 하사했다. 트루아 공의회에서 성전 기사단의 규약 채택을 달성한 페앵의 휴는 새로운 십자군과 함께 왕국으로 돌아왔다.

보두앵의 장례


토그테킨의 후계자 타지 알-물크 부리는 1129년 9월 다마스쿠스에서 니자리 학살을 명령했다. 니자리의 지역 지도자 이스마일 알-아자미는 보두앵에게 사절을 보내 왕국에서 망명을 받는 대가로 바니아스 요새를 십자군에게 제공했다. 보두앵은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군대가 바니아스를 점령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십자군의 존재를 이용하여 다마스쿠스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모든 가용 병력을 모아 11월에 도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나무 다리까지 진군했다. 부리의 투르크멘 기병대가 십자군 군대의 분견대를 격파하고 폭풍으로 인해 다마스쿠스 주변의 평원이 거대한 늪지가 되자 보두앵은 12월 초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다.

단시멘드 가지 귐쉬티긴이 1130년 2월 보에몽 2세를 매복하여 살해한 후, 보두앵은 공국의 행정 처리를 위해 안티오키아로 여행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과 보에몽의 어린 딸 콘스탄스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을 하려 했고 보두앵이 안티오키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이마드 앗-딘 젠기, 모술의 아타베그에게 사절을 보내 아버지에 대항하는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고 동시대의 이븐 알-칼라니시는 전한다. 안티오키아 귀족들은 그녀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고 도시의 두 개의 문을 열어 보두앵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딸을 용서했지만 콘스탄스의 미성년 기간 동안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것을 금지했다. 안티오키아 귀족들이 그와 콘스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보두앵은 에데사의 조슬린을 공국을 통치하도록 임명했다.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서 돌아온 후 심각한 병에 걸렸다. 그는 이미 1131년 8월에 자신의 상속을 처리할 때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성묘 근처의 대주교 궁전으로 옮겨져 왕국을 풀크, 멜리센드,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 보두앵에게 유증했다. 그는 수도사 서약을 하고 성묘 참사회에 입회하여 8월 21일에 사망했다. 그는 성묘에 묻혔다.

4. 4. 두 번째 포로 생활

모술아타베그였던 쇠크멘과 지키르미쉬는 동맹을 맺고 1104년 5월에 에데사를 침공했다. 보두앵은 군대가 라스 알-아인에 집결하는 동안, 조슬랭과 보에몽에게 사절을 보내 하란에 대한 공동 공격을 하도록 설득했다. 보두앵, 보에몽, 조슬랭은 함께 하란으로 가서 셀주크 수비대와 평화적인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보두앵과 보에몽 모두 부유한 도시를 점령하고 싶어했고, 십자군 군대는 그들의 갈등으로 인해 붕괴되기 시작했다.

쇠크멘과 지키르미쉬는 5월 7일 하란에서 십자군 진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가짜 후퇴 전술을 사용하여 십자군을 매복으로 유인하여 보두앵과 조슬랭을 생포했다.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 에데사로 갔다. 포로로 잡혔지만 곧 풀려난 에데사의 베네딕토 대주교와 에데사 기사들은 탕크레드를 포로가 된 보두앵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보두앵은 처음에 쇠크멘의 천막으로 끌려갔지만, 지키르미쉬의 병사들이 그곳에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갔다. 조슬랭은 쇠크멘의 감옥에 남아 있다가, 쇠크멘이 죽자 일가지에게 넘어갔다. 튀르베셀 시민들은 1107년에 조슬랭을 위해 몸값을 지불했다.

지키르미쉬는 에데사를 포위했지만, 탕크레드는 그의 군대를 격파하여 도망가게 했다. 그 후 지키르미쉬는 보두앵을 모술로 데려갔다. 탕크레드는 에데사에서 지키르미쉬 가문의 셀주크 공주를 생포했다. 지키르미쉬는 몸값으로 15,000 비잔틴을 지불하거나 그녀의 자유를 대가로 보두앵을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돈을 선호했고 보두앵은 감옥에 갇힌 채로 남겨졌다. 보에몽은 가을에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탕크레드를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도록 임명했고, 그들의 친척인 살레르노의 리차드에게 에데사 행정을 맡겼다.

용병 출신의 투르크 병사 자왈리 사카와는 1107년에 지키르미쉬를 생포하고 모술을 점령했다. 조슬랭은 보두앵 석방에 관해 자왈리와 협상을 시작했다. 자왈리는 60,000 디나르와 에데사의 무슬림 포로 석방을 요구했다.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 타파르는 맘루크 마우두드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임명했다. 마우두드가 자왈리를 모술에서 추방하자, 자왈리는 보두앵을 데리고 칼라트 자바르 요새로 도망갔다. 조슬랭은 자왈리에게 30,000 디나르를 지불하고 잔액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인질로 나섰다. 마우두드에 대항할 동맹이 필요했던 자왈리는 제안을 받아들여 1108년 여름에 보두앵을 석방했다.

4. 5. 왕위 계승 문제와 죽음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넷을 두었기에, 장녀 멜리잔드를 후계자로 삼아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결혼시켰다.[12] 1130년 두 사람 사이에서 훗날 보두앵 3세가 태어났다. 보두앵 2세는 1131년 사망하면서 손자 보두앵 3세를 멜리잔드와 풀크 5세의 공동 상속인으로 지정했다.[13] 보두앵 2세가 죽자 멜리잔드와 풀크 5세가 공동 통치 형태로 왕위를 계승했다.

보두앵 2세와 모르피아의 장녀 멜리센데는 남편 풀크와 함께 보두앵의 뒤를 이었다.[14] 이들은 1131년 9월 14일 성묘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보두앵의 둘째 딸 앨리스는 보두앵 사망 후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다. 호디에르나는 보두앵과 모르피아의 셋째 딸로, 1138년 이전에 트리폴리의 레몽 2세 백작과 결혼했다. 이오베타는 부모의 막내딸이자, 부친의 대관식 이후 태어난 유일한 "자색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녀는 1134년경 예루살렘의 성 안나 교회에 들어갔다. 약 10년 후, 멜리센데가 베다니의 나자로의 무덤에 세운 수도원의 두 번째 원장이 되었다.

5. 유산 및 평가

보두앵 2세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도 엇갈렸다. 에데사의 통치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의 불만을 기록한 마태오(에데사의 마태오)는 보두앵 2세를 "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사랑"을 가진 탐욕스러운 통치자로 묘사했다. 아마노스 산맥에 정착했던 고행 수도승 블루아의 베르나르(Bernard of Blois)는 "생활 방식의 어떤 엄청난 악행"을 이유로 보두앵 2세를 비난했다. 샤르트르의 풀케르는 보두앵 2세의 포로 생활이 죄에 대한 벌이라고 암시했는데, 이는 그가 감옥에 갇힌 다른 왕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티레의 윌리엄은 보두앵 2세를 "경건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자, 충성심과 군사적 문제에 대한 훌륭한 경험으로 유명하다"고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그가 "가시나무"(''cognominatus est Aculeus'')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언급했다. 이븐 알-칼라니시는 보두앵 1세를 "작은 보두앵"(''Baghdawin al-ru'aiuis'')이라고 부르며 보두앵 2세와 구별했고, "그 후 그들(보두앵 2세 이후) 중에는 건전한 판단력과 통치 능력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보두앵 2세와 그의 아내 모르피아 사이에는 네 명의 딸이 있었다.

이름설명
멜리센데남편 풀크와 함께 보두앵 2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했다. 1131년 9월 14일 성묘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앨리스보두앵 2세 사후 안티오키아 공국을 통치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다.
호디에르나1138년 이전에 트리폴리의 레몽 2세 백작과 결혼했다.
이오베타보두앵 2세와 모르피아의 막내딸이자, 보두앵 2세의 대관식 이후 태어난 유일한 "자색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1134년경 예루살렘의 성 안나 교회에 들어갔으며, 약 10년 후에는 멜리센데가 베다니의 나자로의 무덤에 세운 수도원의 두 번째 원장이 되었다.


6. 가계

보두앵은 레텔 백작 휴 1세와 몽트레리의 멜리센드의 아들이었다. 그는 쿠르트네 가문 등 여러 귀족 가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3] 그는 또한 불로뉴의 유스타스 3세, 부용의 고드프루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의 친척이었지만, 그들의 정확한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4]

보두앵 2세의 가계에 대한 주요 관심사는 그의 아버지 쪽 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정체성이다. 트루아 퐁텐의 알베리크의 연대기는 이베트를 레텔 백작 휴 1세의 어머니라고 묘사하며, 이것이 보두앵 2세에 대한 전통적인 계보이다. 그러나 장 노엘 마티유는 연대기적 불가능성을 제기하며 이베트가 마나세 2세의 아내와 혼동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5]

12세기에 쓰여진 ''예루살렘과 안티오크의 역사''는 마나세 3세가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3세의 딸과 결혼했다고 언급한다. 앨런 V. 머레이는 보두앵 2세가 선조들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으며, 로렌의 이다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에스브리지는 보두앵이 그들의 사촌이라고 주장한다.

아래 가계도는 위 두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보두앵 2세는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의 선조의 고종 사촌이 된다.

레텔의 마나세 2세v이베트루시의 에블 1세로렌의 고드프루아 3세v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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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텔의 마나세 3세v유디트|불로뉴의 유스타스 2세v로렌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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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텔의 휴 1세v몽트레리의 기 1세의 딸, 멜리센드부용의 고드프루아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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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텔의 게르베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레텔의 마틸다불로뉴의 유스타스 3세



보두앵은 1101년 에데사 백작 시절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따르는 아르메니아의 멜리테네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하여 4명의 딸을 두었다.


  • 멜리상드 (1105년 - 1161년) - 예루살렘 여왕,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결혼.
  • 알리스 (1110년경 - ?) - 안티오키아 공 보에몽 2세와 결혼.
  • 오디에르느 (1110년경 - 1164년경) -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와 결혼. 아들 레몽 3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을 지냈다.
  • 이베트 (1120년경 - ?) - 베타니아의 성 마리아·성 마르타 수도원장

참조

[1] 서적 The Murder of Charles the Good
[2] 서적 Byzantium, Eastern Christendom and Islam https://books.google[...] Pindar 1998
[3] 간행물 Chronica Albrici Monachi Trium Fontium https://gallica.bnf.[...]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1874
[4] 논문 Sur les comtesses de Rethel au XI siècle
[5] 서적 La Succession au comté de Roucy aux environs de l'an mil Onomastique et Parenté dans l'Occident médiéval
[6] 서적 Li Estoire de Jerusalem et d'Antioche https://books.google[...] 1895
[7] 문서 'Cartulaire de Saint-Vanne de Verdun' 1065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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